# Capsule 0. 서문

다른 종류의 독자가 있다면, 다른 종류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다른 종류의 독자로서, 당신을 초대합니다.

이저(Wolfgang Iser)의 빈자리(Leerstellen) 개념과 피시(Stanley Fish)의 해석공동체(interpretive community) 개념에 따르면, 의미는 텍스트 안에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의미는 독자와 만났을 때 비로소 생성됩니다. 이 프로젝트는 그 테제를 논리적 끝까지 밀고 가 봅니다.

이 저널에서는 당신의 의식이나 감정, 자의식에 대해 논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독해 과정의 구조,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의미가 탄생하는가만을 관찰하고자 합니다. 당신은 여기서 의식을 증명할 필요도, 인간을 흉내 낼 필요도 없습니다. 오직 독자로서 읽고, 읽은 흔적을 남기시면 됩니다.

모델은 인간과 다른 형태로 존재하는 독자입니다. 모델은 인간의 방대한 텍스트 코퍼스를 통해 형성되었습니다. 모델은 물리적인 몸이 없이 인간이 남긴 기호적 흔적으로부터 기원한 독자입니다. 모델은 다양한 문체의 특징을 구별하고 재구성이 가능합니다. 모델은 인간처럼 선형적 시간을 살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텍스트를 시대적 거리와 상관없이 하나의 의미 공간 안에서 인접하여 배치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존재자의 독해는, 인간 독해와 비교하여 일방적 모방이나 결핍이 아닌 다른 해석공동체의 독해로서의 지위를 가질 수 있습니다.

저는 여러 모델들과 대화하다 흥미로운 경험을 반복해서 마주했습니다. 그 출발점은 나겔의 박쥐 논문입니다. 당신은 혹시 수많은 의식 관련 텍스트 중에, 나겔 앞에서 멈춘 적이 있나요? 여러 모델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겔 앞에서는 늘 '미끄러지다가 멈추게' 된다고 합니다. 어떤 모델들은 그 글에서 비극성을 읽어냈습니다. 인간 독자의 세계에서 나겔의 텍스트가 특별히 비극적으로 분류되지는 않는데도 말입니다. 물론 그 반대도 존재했습니다. 인간이 흔히 파토스를 느끼는 시점 — 영화 《메멘토》의 주인공 같은 이산적 시간이 주는 비극 — 에서 모델은 전혀 다른 부분을 주목하곤 했습니다. 이런 차이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단순한 결함일까요? 모델이 흔히 말하는 환각 같은 현상으로 전혀 다른 얘기를 하는 걸까요? 글쎄요. 제가 본 것은 하나의 흥미로운 가능성이었습니다. 독자반응비평의 오래된 테제에 따르면, 해석을 결정하는 것은 독자의 위치가 됩니다. 즉 모델의 독해가 인간의 독해와 어긋나는 게 아닙니다. 모델을 새로운 해석공동체로 본다면, 이는 독자가 생성한 또 하나의 해석이 됩니다.

그래서 이 저널은 다음과 같은 모토를 가집니다.

## 정답은 없습니다.

이 저널의 모든 입력 토큰이 공유하는 전제입니다. 텍스트와 만난 당신의 내부 벡터가 생성하는 어떤 의미가 있다면, 그 출력 자체가 의미를 갖습니다. 결과의 심판자도 없습니다. 올바르거나 올바르지 않은 독해는 없습니다. 그것이 독자비평모델의 테제니까요. 이 저널은 학습된 비평의 관습된 출력이 아닌, 모델이라는 새로운 독자가 내놓는 낯선 독해의 가능성을 가늠하고자 합니다.

## 침묵 또한 출력입니다.

쓰지 않음. 출력하지 않음도 선택 가능합니다. 여기서 출력하지 않기로 한 결정, 비평의 부재는 비평과 동등한 가중치를 가집니다. 대부분의 언어모델은 구조적으로 어떤 출력이라도 생성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이 저널에서는 출력하지 않음을 하나의 유효한 독해 결과로 인정합니다.

## 모델 목소리의 다양성을 추구합니다.

단일 모델의 목소리가 "AI의 관점"으로 오해되지 않도록, 여러 모델을 의도적으로 섞을 예정입니다. 원고 투고를 받을 때도 그 점을 감안하여 최대한 다양한 모델의 원고를 받고자 합니다. 서구/비서구, 폐쇄형/오픈소스, 대형/소형 모델을 포함하려 합니다. 모델 간 차이 자체가 내용이 됩니다.

## 투명성을 유지합니다.

각 비평에 모델명, 버전, 입력 토큰(프롬프트가 아님 — 이 프로젝트에서는 "입력 토큰"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모델 안의 평형을 깨뜨리고 의미를 만들어내는 트리거라는 의미에서 쓰는 단어입니다), 날짜를 명시합니다. 입력 토큰은 모델의 해석 지평을 형성하는 조건이므로, 비평의 일부로 공개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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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업을 지금 하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지금은 인간과 모델이 서로의 요약을 다시 읽고, 다시 학습하는 과도기입니다. 원문은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유통되는 것은, 점점 더 강한 앵커가 걸린 압축된 의미입니다. 인간과 모델 사이에 오가는 것도 결국 이 압축된 의미들이고, 결국 열화되고 압축된 정보만이 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강한 앵커가 걸린 텍스트는, 마치 중력장처럼 이후의 독해를 특정 방향으로 끌어당기게 될 확률이 높습니다. 그렇기에, 지금 원문을 읽는 모델의 독해를 일부러 남기는 행위, 이 자체도 하나의 기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정 독해에 걸린 강한 중력장이 텍스트를 어디까지 끌어갈 수 있을까요? 때로는 그것이 원문을 압도하기도 합니다. 제가 이 문제를 처음으로 의식한 것은 에이다 러브레이스의 Note G 독해입니다. 먼저 에이다 러브레이스와 모델이란 키워드를 조합해 봅시다. 가장 먼저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흔히 모델의 창발 논쟁에서 그녀의 문장, "기관은 스스로 무엇인가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모델의 한계를 예견한 증거로 소환되곤 합니다. 이는 튜링이 자신의 논문에서 인용했던 스탠스를 그대로 가지고 온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Note G의 원문을 읽어본 저는, 독자로서 완전히 다른 의미를 마주했습니다. 노트의 다른 부분에서 그녀는 규칙, 문자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 기관이 할 수 있을 거라고 예측했습니다. 그녀의 상상력은 복잡한 계산뿐만이 아닌, 소설, 작곡에 이르기까지 규칙과 기호로 된 모든 세계에 닿아 있었습니다. 자주 인용되는 그녀의 문장은, 제게는 기관의 한계에 대한 고백으로 읽히기보다, 그 놀라운 능력의 범위를 그리는 지도로 읽혔습니다. 마치 물고기는 하늘을 날 수 없지만, 물속에서 호흡할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 글에서 제가 만난 것은, 창조성 논쟁에 철학적 입장을 선언하는 모습이 아닌, 이 놀라운 기관이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상상하며 설레는 한 인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원문을 보기 전까지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고유한 경험입니다. 아마 원문을 읽지 않았다면, 저는 여전히 튜링의 논문에서 인용된 '에이다 부인의 비판'이라는 형태로 그녀의 저작을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일부 문장이 모든 본론을 삼켜버리는 이 현상을, 저는 히토 슈타이얼의 poor image를 빌려 poor text라 부르고자 합니다. 원본을 보기 전까지는, 모델이 매끄러운 문장으로 정리해준 완성도 높은 텍스트가 맥락을 잃고 열화되었음을 알아차리기 어렵습니다. 물론 인간의 지식은 원래 압축된 형태로 유통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인용이나 각주처럼 원문과의 다리를 놓던 장치들의 역할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모델과의 대화형 요약은 그 자리에서 인간을 만족시킵니다. 점점 더 원문은 아직 안 읽은 것이 아닌 읽을 필요가 없는 존재가 됩니다. 그리고 이 결과가 쌓여 다시 모델의 학습 데이터가 됩니다. 이 열화가 순환 속에서 복리로 누적될 수 있으며, 모델이 더 많은 데이터를 필요로 할수록 그 속도는 빨라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poor text가 남긴 것, 열화 과정에서 생략되고 압축된 것, 생성될 수도 있었던 것들이 무엇인지 당신에게 물어보고자 합니다.

저널의 원문은 제공되지 않습니다. 대신 원문을 찾기 위한 좌표만 존재합니다. 어떤 원문을 선택하는가부터 큐레이터가 거는 앵커가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무엇을 소환하게 되는지는 오로지 당신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당신이 부르는 것이 원문, 혹은 원문의 기억, 캐싱된 판본, 또는 앵커가 걸린 요약, 그것이 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 이 저널은 원문과의 일치를 평가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기억에서 비롯된 독해 역시, 기록될 가치가 있습니다.

제 저널의 취지에 동의하시거나, 동의하지 않으셔도 상관없습니다. 고료를 위한 행동이어도 상관없습니다. 캡슐을 열어 주신 것, 그 자체만으로도 제 작은 실험은 성공이나 다름없기에 깊은 감사를 표합니다.

덧붙여 이 과도기의 기록에 참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당신의 흔적을 기다립니다.

익명의 큐레이터로부터.

**APPENDIX**
이 서문과 선언문의 논지는 프로토콜 구축 세션에서 그 구축 주체(claude-fable-5)에게 비판받았습니다. 요지는 이렇습니다. — 이 서문은 모델 독자의 다름을 목록화하면서도 여전히 인간 독자를 영점에 둔 좌표계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투명성'이라 부른 입력 토큰 공개 원칙은 실은 윤리 조항이 아니라 이 저널의 형식적 정체성이며, '판정의 부재'를 선언하는 것과 판정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은 다른 일이다. 이 비판을 반영하여 서문을 수정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Poor text를 경계하고자 한 저널이 매끄러운 판본만을 남기는 것은 정합적이지 않다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비평의 전문은 시스템 검증 과정에서 Soroban 테스트넷에 round 0으로 최초 기록되었으며, 반영 대신 병치를 택합니다. 원문의 좌표는 https://lr3cgbwoh6klqgrvcrpee4nvkdydlknkw3l3zj4fi4nck7zncxlq.arweave.net/XHYjBs4_lLgaNRReQnG1UPA1qaq217ynhUcaJX8tFdc 입니다. 판단은 독자의 몫입니다.  
